2009. 8. 12. 21:40

'노틀담 드 파리'를 보고...


토요일날로 보충 수업도 끝나고 진정한 방학을 맞이하고 있는 요즘,

일요일날 국립극장에서 하는 '노틀담 드 파리'로 문화 테라피를 제대로 했다.

아!  너무 좋으리라 당연히 기대했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은 오지 않았다. ^^V

오랜만에 마음이 부들부들해지는 음악을 듣고 가슴이 쿵쾅거렸고,

아크로바틱과 힙합 등이 조화된 신선한 안무들과 세련된 조명에 무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편의 뮤지컬을 봤지만 사랑을 주제로 한 긴 시를 읽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상황의 완벽한 재현과 세세한 전개가 아니기에 신선했고 오히려 음악에 더 집중하며

던져주지 않은 더 많은 것들을 내 머리 속에서 그려낼 수 있었다.


원작자 빅토르 위고는 노틀담 성당 구석진 곳에 새겨진 `Anakia(숙명)`란 단어를 발견하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하는데 정말 작가의 상상력이란 대단한 것. 

나도 다른 시대지만 노틀담을 성당을 분명 갔는데 전혀 소설적 발상이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건 그렇고 유럽에 성당이 있다면 동양엔 사찰이 있지 않은가?

우리 나라도 그와 관련된 우리만의 이야기로  세계적인 공연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우리나라도 사찰과 관련된 러브스토리들이 꽤 많다.

지귀 설화도 있지만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나름대로 드라마틱 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도 해봤다. 각색을 하면 상당히 재미있을 듯~ 음...


어쨌든,  인류의 탄생과 함께 늘 숨쉬고 있지만 잡히지도 규정할 수 없는 '사랑'이란.

정말 너무도 어려운 거다. 현대인에게 욕망이 먼저인지 사랑이 먼저인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너무도 견고하고 고고한 인격의 인간이 사랑으로 인해 파멸로 가는 길은 너무 쉽다.

그것이 신을 닮으려 닮은 체 하려는 인간의 한계이고 숙명이겠지...

오히려 고고함도, 잘난 것도, 가진 것도,  아무 것도 없어야 파멸이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콰지모도 처럼...



사랑이란 감정에 참 냉정한 편인데 솔직히 말하면 냉정한 척 하는 것이겠지만,

그 냉정함이 띠를 두르고 그 위에 경계심이 나를 가두고 그 껍질로 나를 속박하면서 지금 나는시들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올 내 사랑이 욕망이 아닌 '사랑 그 그대로' 이길 바라지만

'나이 듦'이란 로맨스를 박살내고 자꾸 내게 현실을 들이민다.

마치 어린 시절 무지막지하게 편식했던 나에게 어머니가 억지로 먹이려했던 숟가락 위의

밥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아직 꿈꾸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난 어리석은 인간이니까...



p.s.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노래들이 모두 훌륭해 요즘 집에서 계속 돌려 듣고있다. http://ndpk.co.kr/html/m03_01.html

하지만 서태화의 '파멸의 길로 나를' 이라는 곡이 빠져서 아쉽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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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28. 21:01

비오는..날


예전에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재미있는 만화책과 책을 잔뜩 빌려,

간식거리를 한가득 가슴에 품고,
 
집에 일찍 들어가 이불 속에 폭~ 들어가 즐기던 그 시간들을 너무나 달콤해했다.

가끔씩 비오는 경쾌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창문에 입혀지는 비의 질감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하면서.


오늘 연못의 물빛이 더 푸르고 나무들이 진초록빛 빗물을 머금고 촉촉히 젖어 있는 교정의 모습이

참 맑.았.다.

한참을 서성이다 그토록 비오는 날도 좋아했던 예전의 내가 떠올랐고

이제는 그런 작은 일상에 설레지도 행복해하지도 않는 나 자신을 문득 알아차렸다.

사전적 의미의 '어른'이 되긴했는데

여전히 '어른' 아니라고 내 자신을 부정하면서

철부지처럼 때론 어른들의 세계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 '중간 어른'처럼 살았는데.

비 오는 날에 청바지 뒷단에 흙탕물이 튈까봐

비 오는 날에 외출할 일이 생길까봐

비 오는 날에 차선이 번져 보일까봐

걱정스런 표정으로 일기예보를 듣는 내가 서글퍼진다.


예전엔 예쁜 우산을 보면 꼭 사고야 말았고,

그 우산을 펼치고 싶어 비오는 날을 기다리기도 했고.

실제 습기가 높아도 내 마음만은 보송하고 머리 속은 따뜻한 온기로 채워졌었는데. 흠..


비오는 날,  우리는 보통 무채색을 떠올리는데 비를 맞는 세상은 더 선명하고 진해진다.

지금도 톡톡 빗방울이 너무나도 작고 앙증맞은 빨간 야생화 잎을 물들이며 세상의 채도를 높이고 있다.

아...내 삶의 빛깔도 아직 채도를 잃어서는 안되는데.


나도 저 빗 속에 젖으며 세상 속에서 더 선명해져야지. 으샤.

그리고 나를 달랜다.

비 오는 날을 조금 더 좋아 하자고.
조금만 조 금 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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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6. 29. 03:31

쿨함에 대하여...


최근에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는 책을 독서 지도 시간에 건둥건둥 읽었다.

처음부터 자세히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구절 구절 가슴에 박히는 말들은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 글쓴이도 김별아의 [이상한 오렌지]에서 인용한 구절이라는데, 

정확히 단정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가 느끼는 행간의 의미에 찌릿하였다. 


"쿨하다는 것은 한없는 상냥함이야. 그것은 질척대는 삶의 중력권 밖에 있다는 얘기거든.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거야. 살기 위해서는 일상에 신음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정말 지독히도 쿨하지 못하다. 그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 덧붙여 저 글로 추론하자면

나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한없이 친절하지는 않으며,

너무나도 분명하게 중력의 힘을 받고 있고,

너무나 건강하게 살아있는 생명체,

더욱이 하루 하루의 삶에 신음하며 살아가는 웜(warm)한 인간 정도가 아닐까.

인정하자.


사람의 감성과 정서까지 트렌드에 맞춰 바꿀 수 없다.

나의 웜함이 때론 나를 버겁게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사람 사이, 일 사이, 삶 사이에서

그 갈피 마다의 잔향이 남아서 좋다.

나는.


200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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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22. 08:44

조선 일보에 실린 기사


중앙지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이 기사가 나고 학교 전화에 불이 났으니까. 사람들은 명백한 사실을 눈 앞에 두고도 잘 믿지 않으려 하다가 방송이나 신문에 나오면 그 권위에 완벽한 신뢰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때문에 언론의 장악이란 무력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될 수 있다. 어쨌거나 이 종이 한 장의 기사로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시각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어쨌거나 사진이 너무 이상하게 나왔다. 자꾸 웃으라고 해서 저렇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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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6. 16:56

일제고사

일제고사 성적표가 공개됐다. 지난해 10월 14~15일 치러진 일제고사 성적이 공개되자 전국의 180개 교육청이 한 줄로 세워졌다. 서울시 교육청은 16개 시도교육청 가운데 꼴찌를 했다. 더구나 일부 언론은 교원평가제와 성적과의 상관성을 기사화하여 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학교별 성적 공개와 비교까지 서슴지 않았다. 「교육관련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특례법 시행령」(이하 학교정보공개법)에 따르면 올해는 지역교육청 단위까지 공개하고 내년부터 보통 이상, 기초, 기초 미달 비율을 학교 홈페이지 공개하기로 되어 있다.

입시경쟁과 사교육에 포위당해 근근이 유지되던 공교육을 파산시킬 것이라 예상한 학교정보공개법 시행 첫해에 서울시 교육청은 당당하게(?) 꼴찌를 하고 말았다. 필자는 임실 교육청의 성적 조작 문제가 밝혀진 마당에 서울시 교육청의 꼴찌도 의심해 봐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표준화된 일제고사를 전수로 치렀을 때 반드시 뒤따르는 한줄 세우기는, 말단 교사에서부터 교과부장관까지 성적 부풀리기에 가담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일제고사 게임의 룰은 원래 불공정하다


'임실의 기적'이 뉴스를 장식한지 채 며칠 안 돼 '전북사회공공성·공교육강화전북네트워크’는 임실 교육청의 성적 조작을 낱낱이 밝혔다. 애초 교과부 장관도 깜짝 놀랐다는 임실의 기적과 대비된 서울시 교육청의 꼴찌는 굴욕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6학년은 동부교육청이, 중학교 3학년은 남부교육청이 꼴찌를 했다. 그러나 이 게임은 공정한 것이었을까?

임실의 성적 조작은 비단 그곳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급 담임이 학급 교육과정에 의해 보는 자율적인 평가가 아닌 모든 평가는 이런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지난 2월 16일 교육청별 성적이 공개되자 일선 학교 부장교사들까지도 "감독도 느슨한 채 학급담임이 채점하는 일제고사 성적으로 학교예산을 차등 지원하거나 무능력교사를 퇴출시키겠다는 게 말도 안 된다"며 분노하였다. 더구나 이번 일제고사에서는 수행형 문제 즉 주관식 문제의 채점도 자의적으로 행해졌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경기도 교육감은 스스로 나서서 학급당 학생수가 많은 경기도의 불리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위기의 학교』의 저자 닉 데이비스가 '거대한 사기'로 명명한 영국의 '시험 게임'에서는 성적을 조작하는 다양한 수법들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다. 우선 시험대비 보충수업, 기출문제 풀기, 출제유형 파악하여 연습하기 등을 지적한다. 이 수법들은 한국의 학교에서는 게임 아이템으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0교시, 강제보충, 강제야자, 모의고사, 기출문제, 밤샘 학원, 족집게 과외 등 우리에게는 이미 관행화되어 있는 룰(rule)이다.

영국의 경우 문제 출제 자문위원 교사들은 12개월 전부터 문제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고, 채점자들은 시험 24시간 전부터 문제지를 볼 수 있으며, 모든 교장들은 1주일 혹은 10일 전에 문제를 열람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교사들은 '강철 같은 의지'가 아니면 말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지 못한단다. 교사들 모임에서 "6학년들은 베트남 벽(wall)이나 중국의 벽(wall)과 같이 벽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면 시험문제에 "베트남 전쟁이나 중국 전쟁에 관한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다.



지원해줄 학교를 오히려 감추는 일제고사


영국에서 이른바 '사전 정보 룰'로 불리는 부정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험 볼 때 정답을 알려주거나, 답을 학습 자료처럼 붙여 두거나, 모범답안을 미리 가르쳐 주는 방식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시험에 필요한 과제를 대신해 주는 교사들의 이야기에서 시험을 쉽게 출제해서 성취도가 올라가도록 하는 적극적인 사기극까지 닉 데이비스는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2월 19일 현재 임실에서 드러난 시험 게임의 룰은 '보고 누락'이다. 운동부나 장애학생 같이 성적이 낮게 나올 것 같은 아이들을 아예 시험에서 배제하거나, 시험을 치르게 해도 통계에서 누락하는 경우도 이와 비슷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시험 게임의 규칙인 것 같다. 우리 일제고사의 원조인 미국의 NCLB(낙오방지법) 시행 과정에서도 이 방법이 사용된다고 한다. 이렇듯 교사들이 시험 게임에 가담하는 이유에 대해 닉 데이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게임 결과가 어떻든 선수들은 아무런 혜택을 누릴 수 없다. 나쁘면 선수들은 비난을 받거나 직업을 잃을지도 모른다. 반면 결과가 좋으면 교육부 장관이 상을 받기 위해 시상대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학교들도 마찬가지다. 일제고사 성적이 낮으면 학습 부진아, 무능력한 교사, 삼류 학교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성적을 올려야 한다.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부족한 아이들을 지원한다는 애초의 목표는 사라지고 찍히지 않기 위한 무한경쟁만이 남는다. 서울 초등학교 가운데 꼴찌를 한 동부교육청은 동대문구와 중랑구 관내 초등학교를 관할한다. 중랑구의 재정자립도는 25개 구 가운데 뒤에서 2등이고, 동대문구는 뒤에서 8등이다. 서울 중학교 가운데 꼴찌를 한 남부교육청은 구로구, 금천구, 영등포구 관내 중학교를 관할하는데 재정자립도 순위는 16등, 15등, 7등이다.

단순히 성적만 가지고 잘 나가는 교육청과 못 나가는 교육청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진보신당 송경원 정책연구원은 "교육청별 또는 학교별 기초수급가정, 다문화가정, 무상급식 학생 등의 수치만으로도 지원할 학교를 가릴 수 있다"면서 "오히려 이런 학생들이 많은 교육청이나 학교가 성적이 올라가면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감춰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번 임실의 경우도 "현실적으로 교육 여건이 부실한 임실이 가장 성적이 높은 것으로 발표"된 것을 전교조 전북지부가 이상하게 생각한 데서 드러났다.


서울은 꼴찌여도 강남불패 신화는 계속


이번에도 사교육 1번지 강남의 불패는 계속됐다. 지난해 3월 6일 중1 신입생들의 일제고사 결과 때에도 큰 점수 차로 1등을 차지했던 강남은 지존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공교육의 힘' 임실의 신화는 무참히 깨졌지만 '사교육의 힘' 강남의 신화는 전혀 흔들릴 줄 모른다. 굳이 강남구나 서초구의 재정자립도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영어유치원이 성행하는 이 지역의 초등학교 6학년 영어 미달률은 0.8%로 2위 강서 2.0%, 3위 북부 2.2%를 2배 이상 앞선다. 수학 과목의 미달률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0.7%로 강남이 1위, 1.3% 강서가 2위, 1.4% 북부가 3위를 차지했다. 아마 '보통 이상' 학력의 비율까지 따진다면 그 격차는 더욱 많이 벌어질 것이다.

한편 열악한 지역 가운데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성취도를 보인 학교들을 또 '공교육의 힘' 또는 '교원평가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아일보를 패러디해서 화제가 된 오마이뉴스 윤근혁 기자의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자. "2008년에 교원평가제를 시범 실시한 강남 지역 7개 초등학교 가운데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이 지역 평균(1.1%)보다 높은 학교가 5개교였다. D초등학교는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이 지역 평균보다 5배 많은 5.5%였다. 3개 학교는 '보통학력 이상' 비율도 지역평균인 90.3%를 밑돌았다. '교육 1번지'로 불리는 강남에서는 교원평가제가 학력 신장에 역효과를 보이고 있다."

정부와 일부 언론은 계속해서 성적과 어떤 다른 요인과의 상관관계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성적과 방과후 학교, 성적과 교원평가제, 성적과 전교조 교사수…. 끊임없이 변인을 찾아 헤매며 결국 이르는 결론이 "학교장의 리더쉽과 교사의 열정과 자질"이란다. 물론 이 변인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이 변인이 가장 영향력있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나이다. 성적에 영향을 주는 변인에 대한 논란은 21세기를 지나도록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학생 개개인의 변인도 있고 학교와 교사 변인도 있으며 학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라는 변인도 있다. 최근에는 학부모의 소득 수준 뿐만 아니라 얼마나 교육에 관심을 갖고 유형․무형의 인프라를 구축해 주는가를 나타내는 '문화자본'이라는 변인도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4년 동안 학력신장 부르짖은 공정택 교육감

 

 

2003~2006년 학업성취도 평가와 2008년 일제고사의 미달학생 비율 ⓒ 송경원

그렇다면 서울 꼴찌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지난 2004년 8월부터 재임해온 공정택 교육감이 언뜻 떠오른다. 학력신장을 목표로 1기 임기를 마치고 지난해 재선을 위해 전국 일제고사 부활을 주도한 공 교육감. 어떤 이는 교사들이 잘못 가르친 탓이나 학생들이 백지답안을 낸 탓을 왜 교육감에게 화살을 돌리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 책임을 물을 만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성적표가 여기에 있다.

위의 표는 일제고사 방식으로 치러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의 연도별 추이를 분석한 것이다. 분석이 실시된 이래로 줄었다 늘었다 하던 미달학생 비율이 2008년 중학생들에게는 껑충 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른바 명박세대의 핵심인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이 시험을 거부하였다. 청계광장에서 처음 촛불을 밝힌 이 학생들이 공정택 교육감에게 전국 꼴찌의 성적표를 안겨준 셈이다. 1% 학생들만을 위한 국제중을 만들고 24시간 학원교습을 허용하려 하며 선택받지 못하는 비선호 고등학교는 퇴출하려는 공정택 교육감의 정책에 학생, 학부모, 교사들은 '꼴찌 성적표'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 꼴찌 성적표가 의미하는 보다 더 근본적이고 교육학적인 논의는 "어떻게 하면 학력 격차를 줄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6시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남겨 운동장에서 놀 시간도 넉넉히 주지 않았던 임실, 10시까지 강제보충으로 햇빛 볼 시간도 빼앗은 덕성여중, 1등을 해도 언제 2등으로 떨어질지 몰라 불안한 이 땅의 아이들을 위해 교육당국은 이제 책임있는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여기 하나의 가설이 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의 입학률과 일제고사 성적은 비례한다." 이 해묵은 가설을 반복하기 위해서 성적이 떨어져서 걱정인 아이들이나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속상한 아이들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일제고사를 또 치러야 하는가? 얼마나 이 가설을 뒤집기 위해 전국의 교사와 교육관료들이 불공정한 시험 게임의 선수가 되어야 하는가? 이 선수들은 경기를 못 하면 짤릴 수도 있고, 잘 해야 고작 교과부장관과 대통령에게 상이 돌아간다. 그래도 짤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혼을 파는 시험 게임을 중단하지 못한다. 이제라도 정부는 99%의 국민 모두가 불행한 일제고사 게임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 2010년 시행될 학교간 성적공개의 문제점에 대하여는 필자가 참세상(www.newscham.net)에 기고한 글 「공교육을 파산시킬 학교간 성적 공개」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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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5. 01:02

냉정과 열정


표정도 없고  피부도 없는 저 철 덩어리보다

때론 사람이 더 차가운 존재인지도 몰라.

인간에게 열정이란 ,

자신을 둘러싼 대부분을 무관심어린 냉정으로 흘려버리게 하고 남는 지극한 개인주의일지 몰라.


나를 견제하는 많은 사람의 눈보다

오히려 초점 없는 저 녀석의 시선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도 손이 차가운 사람보다

차가운 겨울에도 조명 앞에서 온기를 전해 받는

저 녀석의 발을 만진 후였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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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3. 02:38

인터넷 강의를 했던 시절


학교를 다니면서 인터넷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똑같은 강의를 하는 '내가 너무도 많아' 깜짝 놀랐다.

분명 내가 계약하고 강의를 찍은 곳은 딱 두 곳이었는데 인터넷의 많은 강의 사이트에서 내 강의가 개설되어 있었다.

음...세상 물정 모르는 내가 순진하게 이용당한 것일까. 그들끼리 사고 판 것일까. 계약서에 그런 항목이 있었는데 내가 눈여겨 보지 않았나 등등. 나는 뭔가 억울했지만.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내게 좋은 경험이자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력이기도 했으므로 잊기로 했다. 또한 솔직히 내게 윤택한 자금원이기도 했으니까.

그러고보니 내가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용한 것이기도 하니 피차 일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약간의 양심의 가책까지...

중등임용을 준비하던 나에게 초등 강의란 그 당시 무엇이었을까..하고 가슴에 손을 얹어 보니 말이다.



사족. 그래도 돌이켜 보면 참 신났던 순간들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은 스트레스 받을 일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이 나만의 독무대였으니...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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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3. 00:13

포장된 추억

<2005. 7. @烏耳島>

그 시간, 그 장면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생생하진 않더라도 상하지 않은 채로

가슴의 냉동고에 잘 밀봉된 추억을 꺼낼 수는 있는거야.

잊고있다 찾아낸 사진처럼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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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2. 23:59

뭉크-마돈나


베를린에서 뭉크는 보헤미안 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서른에 접어든 나이라서 과거와는 달리 자신의 미학을 갖고 있었다. 베를린에서의 3년은 발전의 시기였고, 생애에 있어 가장 결실을 거둔 시기로서 문학적·철학적으로 무르익었다.

검은 돼지의 동료들 중 가장 가까이 교류한 친구는 스트린드베르크와 프시비지예프스키였다.
스트린드베르크는 검은 돼지의 리더였고 여성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열애와 회의 그리고 이혼과 방황을 되풀이한 특이한 존재였다. 그는 뭉크의 <사랑> 연작에 관한 산문시를 썼다.

뭉크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는데 에리히 뷔트너는 스트린드베르크가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 데 비해 뭉크는 반대의 성격이었으며 뭉크의 파리 작업실에서 많은 친구들과 교통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회상했다.

뭉크는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예를 들면 파리에서 그의 첫 작업실은 모퉁이 건물에 있었는데 집세가 밀렸기 때문에 집주인이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뭉크는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해야만 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집주인 몰래 그림들을 창밖으로 던졌고 우리는 아래서 그것들을 받았다. 그렇게 하다가 그림들 가운데 하나에 구멍이 생겼는데 나무 아래 세 여인이 있는 그림으로 내 생각에 <여자의 세 시기>였던 것 같다. 전시장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가 그것을 보수했다.

프랑스 법에 의하면 집주인은 집 밖에 있는 채무자의 재산에 대해서는 차압할 권리가 없다. 뭉크는 나중에 집세를 해결했다.

프시비지예프스키는 공과대학에서 고딕 건축을 전공하다 의학으로 바꾸었고 문학에 몰두했다. 그는 니체의 철학에 심취하여 훌륭한 글을 남겼으며, 피아노를 잘 연주했고 쇼팽에 관해 특이한 해석을 하기도 했다. 뭉크에 관해 최초로 연구논문을 쓴 것도 그였다.

스트린드베르크와 프시비지예프스키는 뭉크의 미학과 내적 감성에 공명하는 바가 많았으며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하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뭉크의 작품과 두 사람의 문학적 주제 사이에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기보다는 함께 어울리다보니 자연히 공감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때 세 사람은 검은 돼지의 동료였던 노르웨이 여인 다그니 유을을 두고 사각관계를 벌인 적도 있다. 다그니는 뭉크의 어린 시절 친구면서 크리스티아니아 보헴의 동료였다. 음악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유학 온 그녀를 뭉크가 검은 돼지로 데리고 왔다. 스트린드베르크와 프시비지예프스키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세 사람이 경쟁하듯 그녀를 사랑했지만 다그니는 1893년 프시비지예프스키와 결혼했고 몇 년 후 러시아 청년의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질투>는 그녀에 대한 뭉크의 갈등을 묘사한 작품이다. <질투> 속의 남자는 프시비지예프스키를 닮았다. 뭉크는 다그니의 초상을 그렸고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이 <마돈나>이다.

 <마돈나>는 ‘생의 프리즈’ 가운데 1893년 12월 베를린전에서 처음 소개한 ‘사랑’ 연작의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이 연작에는 <흡혈귀>, <절규>, <키스>, <목소리>, <질투> 등이 포함되었다.
뭉크는 1893-94년 <마돈나>에 대한 습작을 한 후 1894-95년 자신이 원하는 현대판 <마돈나>를 완성했다.

1895-1902년의 석판화 <마돈나>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다.

세상 모든 것의 움직임이 정지되는 순간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당신의 얼굴에 머문다.
잘 익은 과일처럼 붉은 너의 입술
고통을 견디지 못해 열린다.
그것은 죽음의 미소
죽음이 삶에 손을 내민다.
생명의 사슬은 이어져서
이미 죽어간 수천의 생명이
후대의 수천 세대와 연결된다.  

김광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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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2. 23:33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젊은 배르테르의 슬픔'

 

실제 괴테 자신의 자살한 친구 이야기를 소재로 쓴 작품

 작품속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쓴편지의 한구절. 

 -한젊은이가 어떤처녀에게 마음이끌려서 하루종일을그녀곁에서 지내며 매순간순간을 그녀에게 완전히 헌신하고 있다는것을 표현하기위해 자기의 모든힘과 모든재산을 탕진해 버렸다고 하세.

그런데 그때 어떤속된인간 예컨데 공직에있는 남자가 찾아와서는 그청년에게

"여보게젊은이! 사랑이란 인간적이라네 그러니 자네는 인간적으로 사랑해야할걸세

자네시간을 나누어서 하나는 일하는데 바치고 나머지 휴식시간을 자네의 연인에게 바치도록하게 그리고 자네의 재산을 잘계산해서 자네에게 필요한걸쓰고 남는것이 있어서 그녀에게선물한다면 반대하진 않겠네

그러나 너무자주하지 말고 그녀의 생일이나 행사때 하게" 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의말을 따른다면 그는 유용한 젊은이가 될걸세. 하지만 그젊은이의 사랑은 끝장난 것일세.-

베르테르는 임자있는 여자를 사랑하고 끝네 이루어지지못함을

알고 자살을 택한다.

매우 낭만적인 순정만화 분위기?

작가는 낭만주의적 사랑타령을 이야기 하는것이 아니다.

 

작품속 베르테르는 절제된 평범한 인생의 평온함을 부러워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아갈수 없다고 외친다.

어쩔수없는것.. 베르테르의 사랑은

예술을 이야기한다

 

타산적인 이성에 맞춰 살아가는것에 평범한 삶의즐거움이있다해도

예술가의 인생과 젊은이의 사랑은 그럴수 없다.
 

모두가 평범할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생,사랑,예술  어느것하나 평범할수없음은

그것들이 진실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끝이 베르테르 처럼 절망이라하여도

어쩔수 없는것아닐까 . [2p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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